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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이 살아 있는 내 고향

by 홈쿡쌤 2010.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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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이 살아 있는 내 고향


사람은 자라고 꿈을 키워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죽어서도 고향 땅에 묻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니 말입니다.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온 내 고향 친정집에는 지금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6남매의 막내라 부모님의 사랑 오래도록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휴일 남편과 함께 다녀온 친정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이 살아 있는 곳이기에 언제나 정겹기만 합니다.












가을은 벌써 우리곁에 와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과 그리움만 가득한 곳입니다. 
친정하면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첫째, 부모님 산소

아버지는 막내가 시집가는 것도 보질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몸이 아파 누워계시면서도
"우리 막내 시집가는 건 보고 죽어야 할 터인데."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건만 결국 불효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6남매 공부시키기 위해 농사일을 하시며 5일장을 도시며 소 장사를 하셨습니다. 엄마는 아이들 키워가며 집안일과 들일을 알아서 해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큰오빠가 대학을 다니니 모두가
"저 사람 미쳤어. 미쳤어." 놀려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해 가며 살아오신 아버지는 서당 앞에도 가 보질 못했기에 자식공부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흉을 보고 욕을 하던 동네 사람들이 세월이 흐른 뒤, 가장 부러워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번듯하게 잘 키운 자식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건 모두 부모님 덕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리운 것 같습니다.




둘째, 큰오빠의 산소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참 많은 희생을 하신 분입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발령받아 늦은 결혼을 하여 이북에서 내려온 처가 식구들과 동생들을 데려다 먹이고 학비까지 마련해주며 항상 시끌벅적한 집안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맏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운명 같다고 말을 합니다. 그 많은 식구 아무런 불만없이 챙겨가며 살아가는 큰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 대신이었습니다.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수목장을 원하였으나 형제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부모님보다 조금 앞쪽으로 평 묘를 하게 되었습니다. 봉분이 없어 성묘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장갑 낀 손으로 쓱쓱 문지르면 반질반질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바뀌어야 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큰오빠'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따뜻한 분이 환갑의 나이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립지 아니하겠습니까?
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아픔입니다.


셋째, 재래식 화장실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가끔 한 번씩 가면 가게 되는 재래식 화장실입니다. 한여름밤 이웃집 할머니가 들려주는 귀신이야기를 듣고 나면 화장실 가는 일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엄마! 나 화장실"
"갔다 와."
"무섭단 말이야."
"아이쿠! 우리 막내 할머니 이야기 듣고 더 무섭나 보네."
엄마는 호롱불을 들고 화장실 앞에 서 있어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에는 엄마가 오빠를 시켜 앞에서 지키고 서 있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기 싫어도 할 수 없이 하면서 장난기가 발동합니다. 갑자기 호롱불이 사라져 버리면
"오빠! 오빠! 어디 간 거야? 나 무섭단 말이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얼른 걸어 둔 책 한 장 쭉 찢어 대충 닦고 나오면
"으히히히히히~"
손전등을 얼굴에 갖다 대고 귀신 흉내를 냅니다.
"엄마야!"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보면 오빠임을 알아차립니다.
오빠들은 놀라 울음보를 터뜨리는 막내의 모습이 재밌었나 봅니다.




넷째, 고추장 간장이 익어가는 장독대 

햇살 먹으며 간장이 익어가고 고추장 된장이 맛 들어갑니다. 온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곳입니다. 엄마는 늘 반질반질 빛이 나도록 깔끔하게 장독을 닦으셨습니다. 장맛은 그 집의 음식 맛을 좌우하였기에 그렇게 정성 들였는지 모를 일입니다. 장독대만 보면 엄마 생각이 절로 납니다.

엄마는 몸이 안 좋아 우리 집에서 3개월 정도 생활하시다 몸을 가누지 못하신 지 3일 만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쉽게 가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효도도 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장독을 뒤져보니 온갖 물건들이 다 나왔습니다. 야무지게 담아놓은 연시, 말려놓은 나물과 콩, 그것을 본 큰 올케는
"우리 어머님 정말 대단해. 부엉이 엄마야."
"왜 부엉이 엄마야?"
"온갖 것 다 모아두잖아."

비를 맞고 먼지가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 꼭 엄마가 손질해 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장독 속은 텅 비어 있어 마음 씁쓸할 뿐입니다.


  

다섯째, 아련하게 들려오는 문풍지 소리와 무쇠솥

방에 보일러만 놓여 있는 개량하지 않는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조카들이 와서 침을 발라 문구멍을 내고 놀기도 했고 추운 겨울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얼어붙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 코를 시리게 했던 겨울바람에 사각사각 문풍지 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부엌에는 아직도 반질반질한 무쇠솥이 걸려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들에 나가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아 불이 지펴가며 처음 밥을 했는데 3층 밥이었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 막내딸 기특해. 잘했어."
하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물은 손등 위로 올라오게 붓고 불은 끓어오르면 조금 있다가 꺼 버려야 타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뒤에는 정말 맛있는 밥을 척척해 내곤 했습니다.
 (사진을 찍어 오지 않아 아쉽습니다.)
   


여섯째, 현대의 자동차와 같았던 리어카

어릴 때 리어카는 지게와 함께 유일한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좁은 들길을 걸어올 땐 아버지가 지게를 태워주었고, 큰길에는 리어카를 태워주곤 했습니다.
"우리 막내. 아부지가 태워줄까?"
"응."
두 말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올라타곤 했으니까요.

한 번은 리어카로 크게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오빠들이 짐을 실으면서 막내인 나에게 리어카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뒤를 발로 눌러 실어야 할 텐데 그냥 무거운 짐을 올리다 보니 리어카가 들려 나의 턱을 올려쳐 유치가 부러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엄마는 놀라 뛰어왔고 오빠들은 혼이 났습니다.

방아를 찧으러 가면서 남편이
"당신 오랜만에 한 번 타 볼래?"
"좋지."
천천히 굴러가는 두 바퀴로 나의 추억도 뒷걸음질치고 있었습니다.




일곱째,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정미소
▶ 동네 앞 느티나무
어릴 때 둘째 오빠는 호박에 말뚝을 박을 정도로 장난이 심했습니다. 동네 무슨 일만 생기면 어른들은 우리 집으로 찾아와 둘째 오빠를 찾을 정도였으니까요.
가을이 되면 포구나무에는 검은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워낙 높다 보니 여자 아이들은 따먹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나무타기 전공인 오빠는 쪼르르 올라가 열매를 따서 나눠주곤 했습니다.
"포구 줄게. 아~ 해 봐."
한 개 얻어먹어 보려고 크게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으면 침을 뱉어 놀리기 시작합니다.
"엄마! 오빠 좀 봐! 응 응 응" 울음보를 터뜨리면
"알았어. 알았어. 줄게 줄게."
오빠가 겁을 내는 사람은 엄마뿐이었습니다.






▶ 정미소 풍경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50년은 넘었고 아마 꽤 오래된 정미소입니다. 지금은 사촌오빠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락 한 포를 찧으면 쌀 1되 받고, 아니면 5천 원 현금을 받기고 합니다. 운영상 애로가 있지만 가지고 있으니 그냥 정미소를 돌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 아이들 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고 지냅니다. 오죽하면 쌀나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정미소에서 왕겨가 나오고 현미와 하얀 쌀이 내려오는 걸 보면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걸 보면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덟째, 여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수다가 가득했던 빨래터

토닥토닥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방망이 소리가 들려와 달려가 보았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디서 예쁜 새댁이 와서 사진을 찍노?"
"안녕하세요? 저 정수댁 막내딸입니다."
"아이쿠! 그래 말을 하니 알아보것네. 우리 딸하고 동기 아이가."
"네. 맞아요. 친구도 잘 지내죠?"
"응. 부산서 잘살고 있다."
"어머님은 건강하시죠?"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지."

친정에는 아직도 빨래터가 남아 있습니다. 여자들이 모여 이런저런 일들로 수다를 떨며 빨래는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곳입니다.

저렇게 어르신들을 보니 먼저 가신 엄마가 더욱 보고 싶어졌습니다.





아홉째, 입가를 검게 물들이며 따 먹었던 까마중

우리가 자랄 70년대는 먹거리가 없어 늘 배고픔에 허덕였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들판에 산에서 나는 열매가 어린 녀석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습니다. 여름이면 까맣게 익어 있는 까마중을 따서 입이 검어지도록 먹었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열 번째, 멱감던 시냇가


학교 갔다 오면 책보를 마루에 던져놓고 익지도 않은 감 하나를 따서 시냇가로 달려갔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물가에서 수영을 즐겼습니다.
'감을 던져놓고 먼저 잡기'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놀고 나면 돌멩이로 감을 쪼개 떫은 풋감을 나눠 먹곤 했습니다.

또, 막내로 자라 동생이 없었기에 큰오빠가 늦장가를 가서 낳은 조카가 왜 그렇게 예쁘던지. 중학교 때인가? 시골로 놀러 온 조카를 데리고 물놀이를 하다 잠깐 한 눈 파는 사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 조카가 자라 35살이 되어 시집까지 갔으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물이 아니지만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옛날이 더욱 떠올랐습니다.

고향은 그래서 엄마 품 같다고 하나 봅니다.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추석이 가까워지니 부모님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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