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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추석연휴 여행떠난 올케, 왜 이렇게 울컥하지?

by 홈쿡쌤 201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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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 여행떠난 올케, 왜 이렇게 울컥하지?



추석 전날부터 이 땅의 며느리들은 추석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 고기를 굽고 전을 부치고 부산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남편도 함께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차례상을 준비하는 절대적인 시간이나 노력은 대부분의 며느리 못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차례 음식뿐만 아니라 도착하여 떠나는 순간까지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핵가족화로 단출하게 해 오다 많은 가족 끼니만 해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점차 명절 풍습도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에 나가 있는 형제들이 하나둘씩 빠져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대신 휴가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차례를 지내는 사람도 있고, 차례 음식도 주문해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특히 독신자가 늘어나고 딸만 둔 가정의 경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도하에서 이어온 제사나 명절 차례는 변화가 불가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기에 부모님은 벌써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안 계십니다. 명절이라도 돌아갈 친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까이 사는 형부와 언니한테 찾아가는 게 전부입니다.
"처제 어서 와!"
하나밖에 없는 처제라 형부의 사랑은 각별합니다. 잔 정도 많아 나눠주는 것도 잘하십니다. 과일을 썰어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 큰 올케는 며칠 전에 왔다갔다고 산소 안 온다고 하더라."
"올케 제주도라고 하던데?"
"나하고 통화할 때는 아무 말 없었는데."
"내가 어디냐고 자꾸 물으니 그러더라."
"그래?"

변화의 물결 때문이었을까? 그 말을 들으니 왜 그렇게 서운하고 울컥하던지. 어제는 마음이 어수선하여 부모님 산소를 다녀왔습니다.



▶ 부모님 산소


아버지는 막내가 시집가는 것도 보질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몸이 아파 누워계시면서도
"우리 막내 시집가는 건 보고 죽어야 할 터인데."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건만 결국 불효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6남매 공부시키기 위해 농사일을 하시며 오일장을 도시며 소 장사를 하셨습니다. 엄마는 아이들 키워가며 집안일과 들일을 알아서 해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큰오빠가 대학을 다니니 모두가
"저 사람 미쳤어. 미쳤어." 놀려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해 가며 살아오신 아버지는 서당 앞에도 가 보질 못했기에 자식공부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흉을 보고 욕을 하던 동네 사람들이 세월이 흐른 뒤, 가장 부러워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번듯하게 잘 키운 자식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건 모두 부모님 덕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리운 것 같습니다.


▶ 큰오빠 산소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참 많은 희생을 하신 분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발령받아 늦은 결혼을 하여 이북에서 내려온 처가 식구들과 동생들을 데려다 먹이고 학비까지 마련해주며 항상 시끌벅적한 집안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맏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운명 같다고 말을 합니다. 그 많은 식구 아무런 불만 없이 챙겨가며 살아가는 큰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 대신이었습니다.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수목장을 원하였으나 형제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부모님보다 조금 앞쪽으로 평 묘를 하게 되었습니다. 봉분이 없어 성묘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장갑 낀 손으로 쓱쓱 문지르면 반질반질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바뀌어야 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큰오빠'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따뜻한 분이 환갑의 나이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립지 아니하겠습니까?
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아픔입니다.
"오빠! 가족들은 제주도 여행 갔어요."
그 말을 하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일주일에 한 번은 시골집에 와서 깔끔하게 청소하고 텃밭도 가꾸곤 했습니다. 큰오빠의 정성으로 마당 가에는 대추 석류 감이 주렁주렁 열려 우리에게 나눠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제사 때에는 학교에 연가까지 내 전을 뒤지고 올케와 함께 일하곤 하셨고, 언제나 명절이면 고향에서 차례를 지냈습니다. 동생들도 고향을 찾아야 한다며 말입니다. 하지만, 큰오빠가 떠나고 나니 친정도 사라진 기분이고 고향 집은 폐허가 되어갑니다. 올케는 자식들이 터를 잡고 사는 곳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살아계실 때 엄마는 조용한 사찰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모두 교회와 성당을 나가는 것을 보고 몇십 년을 다니던 곳을 당장 그만두시고 동네에 있는 교회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한 집에 두 개의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복 못 받아."
자식을 위한 단호한 행동이었습니다.

큰 오빠는 사촌과 동생들을 위해 여느 집과 다름없이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먼저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본 후 딸들은 잔을 따르고 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좋다는 말이 있어 큰 오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상차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모! 서운하지 않겠어?"
"아니. 우리 둘을 위해서라면 하지 마. 언니 힘들잖아."
그렇게 간단하게 예배만 드리고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하면서 정담나누다 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막상 올케와 조카들이 추석연휴를 맞아 여행을 떠났다고 하니 어찌나 서운하던지. 차례상을 차려 절을 올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늘 찾아 와 성묘하고 언니 집에 모여 저녁 한 끼는 먹고 갔기에 큰 선물은 아니더라도 양말까지 사 두었는데....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아 있으니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처제! 제주도 갔던 올케 우리 집에 온단다. 어서 와."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공항에서 집으로 가지 않고 들린다고 하니 선물 꾸러미를 챙겨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오빠를 닮은 조카를 보니 너무 반가워 와락 껴안았습니다.
덩치 큰 조카는
"고모! 내가 많이 보고팠나 보다!"
"아빠 생각나서 이러지? 많이 안아 봐." 하면서 나를 들어올립니다.

그리고 미안했던지 큰 올케는
"작은고모랑 통화할 때는 아무 말 안 했어. 일부러."
"난 그냥 밖인 줄 알았지."
"고모! 김 서방이 여름 휴가도 없었어. 그래서 추석연휴 때 휴가 겸 갔다 온 거야."
"그랬구나. 잘 했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 보니 좋긴 한데
"죽은 사람만 불쌍한 거야."
"산 사람은 어떻게 든 잘 살아가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공감되었습니다.
어려움 다 이겨내고 살 만 하니 떠나버린 큰오빠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니가 차려주는 저녁을 맛있게 먹는 조카들을 보며 서로 얼굴을 마주하니 서운했던 마음 조금은 사라진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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