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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꿈속에서라도 한 번 뵐 수만 있다면.....

by 홈쿡쌤 2008.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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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추석때 사진)


꿈속에서라도 한 번 뵐 수만 있다면.....


아버님을 떠나보낸 지 벌써 10년이 가까워옵니다. 친정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 꼭 아버지처럼 대하고 응석부렸던 셋째 며느리였습니다. 당신아들, 34살의 늦은 결혼 때문이었는지 무척이나 저를 예뻐 해 주셨고, 며느리의 직장생활로 손녀 키우기 어려울 것이라며 당신은 혼자 시골에 계시고 시어머님을 우리 집으로 보내시며

"아가야! 너희 시어머님 모시고 가서 아이 키우거라!" 하셨던 분이십니다. 당신 끼니는 걱정 말라시며...


  우리 아버님은 한량이었습니다. 모시옷에 백구두 신으시고 궁터로 활 쏘려 다시셨던 자그마하시고 건강한 촌로였습니다. 한번도 병원신세를 져 본 적 없었는데, 막내아들의 권유로 종합검진을 받고 난 뒤, 큰 병원으로 옮기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 흉선 암이었습니다. 평소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암 선고를 받고 난 뒤에는 쉬엄쉬엄 시들어 가는 꽃이었습니다. 말기였기에 약도 없다고 하셔 집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병원과 가까운 우리 집에서 몇 개월 지내시다가, 시골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 뒤로는 매일 매일 퇴근을 하고 아이 둘 어린이집에 가서데리고 아직 어린 아들은 앞에 안고 운전을 해 가며, 시댁과의 50분 거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려 가 할아버지와 함께 얼굴 맞대고 놀아 주었습니다.그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의 재롱을 보는 시간만큼은 느끼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 몸은 피곤하지만, 아마 오래 견디시지 못 하시고 우리와 영원한 이별이 찾아 올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제가 받은 그 사랑 조금이나마 되돌려 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점점 세월이 흐르자, 산소 호흡기로 숨을 쉬셔야 했고,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주무시는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그렇게 앓으신 지 1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쉽게 떠나보내기가 너무 아쉬워 49제까지 집에서 모시다가 마지막 날(49제)은 사찰에서 공양을 올리며 보내드렸습니다. 매일 저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지어 놓고 절을 올렸습니다. 자박자박 걷는 아들 녀석이 할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인 음식을 잡아당겨 한바탕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일 때문일까요? 아직도 그 때 일을 기억 하고 있는 녀석들입니다.


  어제는 아버님의 제사였습니다. 평소 국물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뚝딱 해 치우시는 반찬 투정 없으셨던 우리 아버님. 육 남매의 정성어린 제사상 하나 가득 차려놓고 절을  올렸습니다. 뒤에서 가만히 서서 바라보시는 시어머님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엿보였습니다. 든든한 아들 5명이 엎드려 아버님께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 큰 행복을 느끼고 계셨던 것입니다. 

 

  상다리가 휠 정도의 음식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만은 오직 자식들을 위해서만 살아가시다 세상을 등졌기에 제 마음 더욱 아픈 것을....아버님 덕분으로 6남매의 가족과 우리 아이 둘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그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계실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두 손녀 손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중간고사 있다며 따라 나서질 않아 그냥 두고 왔습니다. 녀석들이 더 자라고 나면 꼭 참석 하여 아버님의 그 사랑 느끼도록 하겠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2시 30분....

꼭 12시를 넘겨야 제상을 차리고 절을 올리기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늘 피곤함에 시달리곤 합니다. 셋째며느리로서 조퇴를 맡고 음식을 하러 달려가야 하고, 서울 사시는 둘째 형님은 제수음식을 준비하고, 시장을 보기 위해 하루 전날 내려오셨습니다. 대구, 인천 사는 아주버님 삼촌도 바로 올라가지 못하니 학교에도 사무실에도 연가를 내고 온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가지가지 놓을 것도 많고, 챙겨야 하는 것도 많은 제사문화 요즘엔 많이도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윗대 어른들은 한 개로 합쳐 한 번만 지내고 초저녁에 많이 지내고 간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며느리인 우리는 입도 못 벌리고 있는데 손위 시누가 어머님에게

“엄마! 우리 내년부터 제삿날 하루 늦춰 초저녁에 지내면 안 되나?”
“..................”

80평생을 살아오신 우리 어머님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씀 같았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큰집 아주버님도

“너희들 편할 대로 해~”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큰집에도 12시 30분이 지나야 제사를 지내는 분이십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어머님 하자는 대로 해요.”
“이렇게 늦게 가면 피곤하잖아. 시대도 많이 변했고...”
“그래도 어머님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몇 년 아녜요.”

“허긴, 우리 대에 제사 제사 하지 우리 아이들 제사 지내지도 않을 거야.”
“남의 눈 의식 많이 하시고 체면 따지시는 어머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아요.”

“당신이 힘드니 그렇지!”
“어? 당신 나 생각해서? 아이쿠 고마워라”


11가지의 나물 볶고 무쳐야하고, 생선 다려 쪄내고, 튀김 전 굽는 일 보통일 아니지만, 대대로 내려온 쉽게 버릴 수 없는 제사문화이기에 적응하며 살아가나 봅니다. 변화를 기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어야 하는 지 다 알기에 남이 변화하길 바라는 것 보다 내가 변화하는 게 더 빠르다는 말이 있듯 어머님의 뜻 따라주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 마음 똑 같진 않겠지만, 어머님의 그 마음 읽고 아무도 거역하지 않고 더 이상 입을 다물어 아들들의 효심을 보며 돌아왔지만, 맘 약하신 우리어머님 또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생각할 여유를 가지고 또 의논하면 간소화할 수 있는 좋은 합의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우리, 서로 사랑하며, 서로 배려하며, 나누며 사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또한 살아 계실 때 효도하시길 간절함 담아보는 날로, 그저 아버님을 생각하며 멀리 떨어져 지내는 형제들 만날 수 있다는 기쁨하나로 피곤함 잊는 날이 됩니다. 


오늘따라 무척 그리워집니다.

오늘따라 무척 보고파집니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만나 뵐 수만 있다면....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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