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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내 생애 처음 해 본 '캐디 알바'

by 홈쿡쌤 2008.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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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애 처음 해 본 '캐디 알바'

참 먹고 살기 어려운 세상인 듯하다.

물려받은 유산이 많고 재력가의 아들딸로 태어났다면 생각도 못하는 '알바'

하지만, 서민의 아들딸로 태어났기에 등골 휘는 부모님을 위해 한 푼의 등록금이라도 벌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시간 타임으로 오늘도 뛰고 있나 보다.

어제는 친구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팥칼국수와 팥빙수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아들만 둘인 친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 어제 저녁에는 어서 오세요! 하며 헛소리를 하더니 아침에는 35,000원 입니다. 하는 거 있지."
잠꼬대까지 하는 걸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는 것이었다. 고2 녀석이 마트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던....

어떤 사람이 알바를 하고 있는 친구아들에게 다가와
"이거 전자렌즈에 돌려 줘!" 알바생인 줄 알고 반말에 시켜먹는 건 예사롭고,
"손님~ 셀프입니다." 라고 했더니
들고 왔던 물건을 모두 제자리에 두고 화를 내며 나가버리더란 것입니다. 그걸 본 친구아들은
"엄마! 내가 요새 세상공부 많이 한다." 하더란다.
살다보면 별스러운 사람들 많이 만나게 된다. 그래도 어찌 나와 다르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받아줘야하는 '알바'의 서러움에서 참고 견뎌내는 인내심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돈을 손에 쥐어 본 건 막 대학생이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83년쯤인가? 골프장에서 학교로 단체 캐디 알바를 가게 되었다. 골프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 모르면서도 30분정도 설명을 듣고 따라나서게 되었던...넓은 잔디밭을 걸으며 주인 따라 다니는 강아지마냥 뒤쫓기만 하자 성질 급한 사장님은 "빨리 안 줘?" 제대로 공이 날아가지 않아서 그런지 신출내기인 나에게 화풀이를 해 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니 대꾸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만 조아리다 내려왔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몇 시간 동안 필드를 다 돌고 내려 와 내 손에 쥐어 주는 5천원의 돈

 돈을 번다는 사실이 이렇게 힘겨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시골에서 농사지어 꾸깃꾸깃 손에 잡혀 주던 엄마의 구겨진 돈의 소중함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 와 "엄마~ 이거~"하고 오천 원을 내미니
"왠거야?"
"그냥 내가 번 것이지~"
"그래? 우리 딸 장하네. 네가 갖고 싶은 것 사~"
그러면서 꼭 안아주는데 안쓰러워하는 그 마음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받아 쥔 오천 원....쓰지 못하고 몇 달을 서랍 속에 고이 간직했던 기억이 난다.

  골프장의 경기보조원인 캐디(caddie)는 16세기 영국에서 ‘포터’처럼 짐꾼이나 잔심부름을 하는 젊은 사내(cadet)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프로골프 경기가 활성화되고 골프가 대중화되면서 캐디의 역할과 비중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여자골프의 1인자인 안니카 소렌스탐도 지적했듯 골퍼와 캐디의 호흡은 경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골프가 ‘특권층의 스포츠’라는 왜곡된 인식 때문에 캐디를 하인 취급하거나 막말, 희롱을 일삼는 사례가 심심치 않았다. 요즘엔 대중화 되고, 골프장마다 캐디교육과 매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어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골퍼의 매너는 골프선진국에 비해 아직도 ‘수준미달’이라는 평가인데 80년대라면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난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당장 어렵고 힘겨운 ‘알바’를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내일을 위한 작은 발돋움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우리에겐 미래와 희망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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