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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목욕탕서 자리 양보하는 아주머니

by 홈쿡쌤 2009.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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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서 자리 양보하는 아주머니


겨울 날씨답게 제법 쌀쌀한 바람이 문틈을 뚫고 들어옵니다. 몸이 불편하신 시어머님을 모셔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처음 오셨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83세이지만 젊어서 고생을 한 탓인지 더 늙어보이시는 어머님입니다. 6남매 키워내시고 남은 건 빈소라 껍질처럼 아픈 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더욱 추워진 날씨 탓에 집에서 목욕시킨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

“엄니~ 우리 목욕 갈래요?”
“안 갈란다. 기운도 없는데 넘어지면 어쩌려고.”

“제가 함께 가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넘어져서 너희 성가시게 하면 어떻게 해.”

당신 걱정보다 또 자식 걱정을 먼저 하는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님 긴 머리 감을 수 있겠어요?”
“................”
“옷 다 버리고 하니까. 그냥 목욕가요.”

“그래 알것다. 그럼 가자.”

며느리가 불편하신지 마지못해 따라 나섭니다.


온 가족이 함께 나서 남편과 아들은 남탕으로 딸아이와 나란히 손을 잡고 여탕으로 들어서니 휴일 오후인데도 많은 사람이 붐벼 앉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수건을 깔고 땅바닥에 어머님을 앉히고 따뜻한 물로 추위를 가시게 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댁~ 새댁~”

“저요?”
“응. 이리 와 봐.”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친정엄마여?”
“아뇨.”
“그럼 시어머님이여?”
“네.”

“아이쿠 효부네. 여 앉아라. 난 아무데나 앉아도 된다.”

“아니,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자리 나겠죠. 괜찮아요.”

“아녀~ 어서 시엄니 모시고 와. 편안히 앉아서 씻고 가야제.”

한사코 양보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고맙습니다.” 인사도 끝나기 전에 목욕 바구니를 들고 저만치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딸아이에게 손짓 하자 눈치 빠른 녀석 얼른 할머니를 모시고 와 앉힙니다.


목욕탕에서 자리 양보를 받아보니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하고, 앙상한 뼈만 남은 어머님의 몸은 아른아른 터질 듯한 얇은 홍시 껍질 같은 피부라 껍질이 벗겨질까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어머님, 안 아프세요?”
“응 괜찮다. 시원하네.”

당신이 움직일 수 있어 혼자 머리를 감아왔는데, 이번에는 긴 쪽 머리를 풀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씻겨 주었습니다. 샴푸를 하고 린스를 한 채 곱게 빗질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는 쑥쑥 빠져 한 주먹이 되어 나왔습니다. 너무 놀라서

“엄니,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많이 빠져요?”
“원래 많이 빠져....”

연세 보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빠지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머리를 헹구고 다시 정갈하게 묶어 드렸습니다.

“할머니, 머리 많이 빠지는데 그냥 파마하세요.”

“싫다.”

“파마하면 그냥 수건으로 털면 말리기도 쉽고 감기기도 쉬운데...”

“................”

손녀가 말을 해 봐도 당신 고집을 꺾지 않으십니다. 하긴 내 편안하자고 깎자는 말을 자꾸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고집 부리시는 것 보니 건강해지셨다는 증거인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왜 그렇게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들고 힘없는 걸 보니 꼭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20 ~ 30년 후 바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행히 방학이라 아이들과 함께 점심도 먹고 중간 중간 간식도 챙겨주는데 개학을 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남편이야 아들이니 엄마 챙기는 것 당연하겠지만,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에게 더 다정하게 다가서서 정겹게 이야기라도 나눠줬으면 하는 맘 간절합니다. 학원 갔다 오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공부한다고 나오질 않으니 말입니다. 그걸 눈치 챈 남편은 할머니가 처음 우리 집에 오신 날 아들에게 따뜻한 물로 발을 씻겨 드리라고 시키더군요. 아무 말 없이 두터운 손으로 할머니의 발을 반지면서 씻어 드리면서 서로 따스한 정 나누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어머님을 씻겨 드리면서 딸아이에게 수건으로 할머니 팔 씻어 드리라고 하니 쓱싹쓱싹 힘주어 야무지게 씻어 내렸습니다. 며느리 직장생활 편안하게 하라고 우리 집에 오셔서 지내기도 딸아이를 데리고 가서 키워주신 어머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다른 손자들보다 더 정이 간다고 하는 녀석들입니다.


그렇게 묵은 때 털어내고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조차 상큼하게 느껴졌습니다. 마트에 들러 시장을 보고 시골에서 갑자기 모시고 오면서 편하다며 신고 나오신 흰 고무신이 보기 안 좋아 신발가게에 들려 따뜻한 털신 하나를 사 드렸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는 손자 손녀의 마음,

목욕탕에서 자리를 양보하시는 아주머니의 마음들이 전해져,

따뜻한 봄이 오면 어머님의 건강도 점차 좋아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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