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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집나간 83세 노모를 찾기위한 대소동

by 홈쿡쌤 2009.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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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나간 83세 노모를 찾기위한 대소동
 

 시골에서 혼자 지내시다 이제 자기 몸 하나도 건수하지 못하는 시어머님을 모셔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며칠 전, 아들 녀석이

“엄마! 엄마 이리와 봐!”

“왜? 무슨 일이야?”

“할머니가 낙서를 해 놓았어. 이것 봐.”

아들이 손짓하는 곳을 보니 쓰레기통 안 밖에 볼펜으로 글씨를 써 놓았던 것입니다.

안에는 붉은 글씨로 밖에는 검은 볼펜으로 꼬불꼬불 그려놓았던 것. 쏴리기통

“할머니가 심심하셨나 보다.”

“엄마! 할머니 한글공부 시킬까?”

“그래라.”




시어머님은 83세로 자식들 공부시키는 일에만 자신을 바친 분입니다. 다 내어주고도 모자라 영원한 내리사랑만 하다 이제 기운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나마 시골에서 친구들도 만나고 경로당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하다가 혼자 끓여 먹을 수도 없을 정도라 우리 집으로 모셔왔건만, 각자 자기 할 일을 찾아 떠나고 나면 감옥 같은 사각의 링 속에서 하루 종일 혼자서 지내려고 하니 심심할 수밖에.


저녁에 집으로 들어와 보니 유치원 글씨처럼 꼬불꼬불 한글공부를 한 종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딸아이가 이면지에 가족의 이름을 써 주고 따라 써게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 오늘 글쓰기 하셨어요?”

“응. 공부했다.”

“잘하였어요. 심심한데 공부나 하세요.”

“오래 못해.”

“쉬엄쉬엄하면 되죠.”



딸아이 이름을 쓰면서 'ㄹ' 을 거꾸로 써 놓았습니다. 어머님은 학교 문 앞에, 아니 서당 문 앞에도 가 보질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여자에게 공부를 시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머리가 좋아 잘 외우기도 하고, 총기 있는 시어머님이십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이지만 그래도 읽을 수는 있습니다. 어려운 받침글자를 잘 쓰질 못합니다. 딸아이 할머니가 써 놓은 메모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합니다.

“할머니 치로기 가다오게.”당신 손자 손녀들이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를 찾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치료기 갔다 온다는 메모를 해 현관에 부쳐놓고 가셨다며 말입니다. 자신들을 키워 준 할머니라 그런지 녀석들은 할머니를 돌봐주고 잘 놀아줍니다. 고스톱이 아닌 민화투도 함께 쳐주는 아들 녀석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무척 길게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늦은 오후 딸아이가 전화를 해

“엄마! 큰일 났어.”

“왜?

“할머니가 안 계셔!”

“집에 있지 어딜 가? 잘 찾아 봐.”

“TV도 켜져 있고 수돗물도 틀어놓고 대체 어딜 가신거야?”

머리가 하얀 백지처럼 변하였습니다.

“딸! 밑에 경비아저씨한테 가서 물어봐.”

“알았어.”

“그리고, 노점을 하시는 할머니들한테도 여쭤보고.”

“응.”

“바로 전화해.”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아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잠시 후 관리실을 다녀온 딸아이는

“엄마! 경비아저씨한테 1시 30분쯤 1,000원 빌려서 갔데.”

“그래? 버스 타는데 가 봤어?”

“장사하는 할머니가 그러는데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 정류장으로 갔데.”

“알았어. 아빠한테 전화 해.”


어머님이 사고가 날 때면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출장길인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기다려 보자. 괜찮을 거야.”

“얼른 와 봐. 시골로 가보던지.”

“뭐가 그렇게 다급하냐? 딸이 찾고 있잖아.”

“그럼 다급하지 느슨할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참나! 내 엄마야! 당신엄마야!”

화가 나서 전화를 뚝 끊어버렸습니다. 평소 화장실 가는 일도 어려워하시는데 몸이 좀 나아졌는지 우리가 나가고 난 뒤 아침에는 밥숟가락을 놓고 반찬도 냉장고에 넣고, 설거지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침착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입이 바삭바삭 마르고 어떻게 잘못되면 어떨까 싶어 걱정만 앞서는 나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행방을 알아봤지만 소식은 없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시누이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엄마 집에 들어왔데, 얼른 가 봐.”

“네.”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마음은 벌써 집으로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고, 두 서너 정거장인데 너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집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없고 어머님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 둘 나갔던 가족들이 들어오고 따뜻하게 저녁밥을 해 맛있게 먹었습니다. 과일을 깎아 앉으며

“어머님! 어디 간다고 나가셨어요?”

“촌에 가고 싶어서.”

“그럼 애비 보러 가자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내려가니 가버리고 없더라.”

“엄마! 언제 나한테 그랬어?”

“.........”


어머님은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시골에 가고 싶어 밖으로 나가긴 했는데 호주머니엔 만 원짜리만 있어 버스요금이 걱정되셨나 봅니다. 그래서 경비아저씨에게 천 원을 빌러 버스를 타고 육거리로 갔다고 합니다. 육거리엔 금은방을 하는 남편과 인연을 맺게 중매를 해 주신 친척이 살고 있습니다. 평소 시골 가는 버스를 갈아타며 가끔 들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의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잔돈을 바꾼다고 그곳이라도 들어가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버스를 어떻게 내렸어요?”

“옆에 사람들이 잡아 줘서 내렸지.”

친척집에 도착하니 어머님의 사정을 다 알고 있기에 죽을 끓여 드시게 하고는 택시를 타고 우리 집까지 와서 모셔놓고 되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엄마! 집에 있는 사람들 걱정 시킬 거야?”

“내가 전화를 해야 되는데, 깜박 잊었다.”

“그만해요. 이렇게 아무 일 없었으니 다행이지.”

“앞으로 또 말도 없이 나갈 거야?”

“아니, 안 그럴게.”


파킨슨 초기증상을 보이는 어머님이신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엄마! 이러지 말고 그냥 양로원으로 가자.”

“...........”

“거기가면 친구도 많고 의사선생님도 계시고 돌 봐 주는 사람도 있어.”

“난 싫다. 자식이 몇이나 되는데 남의 집에 안 갈란다.”

"남의 집 아니야. 병원같은 곳이야."
"죽어도 난 가기 싫타."
어찌나 단호하게 말씀하시던지 말을 한 남편이 되러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연세에 양로원에 대한 선입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고 싶어 신청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등외를 받았습니다. 혼자 밥도 차려 드시지 못해 남편이 들어와 점심을 챙겨드리고 일을 보고있고, 겨우 화장실에만 다닐 수 있는데도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등급을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는데 걱정만 앞섭니다. 편안하게 모시고 싶어도 마음처럼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경찰서에 가출 신고까지 하고 멀리 있는 형제들, 행방을 물었던 외삼촌, 고모 댁, 나를 아는 지인들, 저녁 내내 안부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꼭 잘 모시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기분이 야릇했습니다. 몇 시간을 긴장하고 나니 죽은 듯 쓰러져 잠을 자 버린 힘든 하루였습니다.


어머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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