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나에게는 당신이 최고의 피서지였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던 올여름이었습니다. 창밖에는 매미울음소리가 요란하기만 합니다. 땅속에서 지내왔던 억울함 다 쏟아붓는 것처럼 목청껏 울어댑니다. 그래도 게릴라성 폭우가 한차례 지나가더니 이젠 무더위도 한풀 꺾인 기세입니다. 떠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면서 생각나는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라 내 기억은 뒷걸음질치면서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를 그리워해 봅니다.
며칠 전, 남편의 친구들과 부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고향 친구들입니다. 하우스 농사를 짓는 친구들이라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친구 부인 중 한 분의 손에는 아주 커다란 부채가 들려 있었습니다.
"우와! 부채가 어디서 났어요?"
"시어머님이 만들어 줬어요."
"정말요? 어쩐지."
가만히 보니 옛날 엄마가 대를 잘라 문종이로 부쳐 만든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여름휴가 즐긴다고 멀리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계곡으로 바다로 일상 탈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에는 어디 그런 말이나 있었습니까?
모두가 살아내기 바쁜 시절이었으니....
여름만 되면 어릴 때 추억이 떠오르고 엄마가 생각나는 이유
첫째, 시원한 수박화채
제가 태어난 해는 1961년, 7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누구나 다 그랬듯 그 시절은 정말 가난하기만 했습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다녔고,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집에 TV, 라디오, 심지어 시계가 있는지 조사하는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집에 시계 있는 사람"
"음. 그럼 TV 있는 사람"
어느 한 곳에 손을 들지 못하는 저는 그저 가난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하긴 60명이 넘는 친구중에 손을 드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먹거리 또한 많지 않았기에 시골에서 제사가 있는 날, 겨우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막내라 큰집에서 지냈기에 그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큰엄마가 잘라주시는 1/4쪽 아오리 사과 맛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름이면 엄마가 텃밭에 심은 수박 토마토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거름 주고 물 줘가면서 애써 키웠지만 익지도 않았는데 줄기가 말라 크지도 않은 수박을 따서 그릇에 담아 사카린 뿌려 주면 어떻게나 맛나던지. 겉껍질만 벗기고 채를 썰어 기름에 볶아 나물도 해 주었었지요.
어쩌다 아버지가 5일장에서 돌아오면서 새끼에 끼워오는 고등어 한 마리는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며 온 집안에 생선냄새가 진동해도 그 냄새가 싫지 않았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박 한 통은 바가지 속에 넣어 우물에 담가두었다가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 6남매의 입을 즐겁게 해 주곤 했으니까요.
둘째,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시원했던 등목
날씨가 헉헉 목까지 차올라도 부모님은 논에서 밭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을 하셨습니다. 점심때가 되어야 집으로 들어와 밥을 챙겨 드시곤 했습니다. 반찬이라곤 밭에서 나온 오이 풋고추 된장에 찍어 먹었습니다.
요즘처럼 더우면 옷만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때는 시냇가에서 발만 씻고 들어와 곧장 우물가로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중 물로 우물에서 금방 퍼올려 몸에 부으면 깜짝깜짝 놀랠 정도로 차가움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따가운 햇볕도 저만치 도망가게 하는 시원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뜨거운 오후에 즐기는 낮잠도 꿀맛이었습니다.
셋째, 아련한 추억의 물건이 되어버린 모기장
엄마는 다른 사람들 보다 손재주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일하다가 아버지가 부셔놓으면 고치는 건 늘 엄마의 몫이었습니다.
"손에 몽둥이를 달았을까? 맨날 고장 내게."
말은 그렇게 해 놓고 금방 뚝딱 마술을 부리는 손처럼 고쳐내셨습니다.
5일장에 가서 나일론 망사를 사 가지고 와 방문에 달아놓고 부채로 모기를 쫓으며 들락거리도록 했습니다.
"모기가 귀신이야. 사람 따라다닌다."
이리저리 모기를 쫓아놓고 재빨리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더운 마루에 모기장을 치고 자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왕겨와 들에서 베어 온 풀을 섞어 모락모락 뽀얀 연기를 내뿜는 모깃불을 피웠습니다. 그때에는 모기가 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피우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면서 모기는 연기를 싫어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녀석들도 다 자랐으니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고, 아파트에 살다 보니 이제 모기장도 아련한 추억 속의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넷째,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던 엄마의 부채질
어둠이 어둑어둑 내려앉으면 저녁을 먹고 냇가에 가서 목욕하고 들어오면 아버지는 벌써 모깃불을 피워놓았고 엄마는 저녁밥 위에 찐 옥수수를 평상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쫄깃쫄깃한 찰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붑니다.
"막내야! 얼른 먹고 빨래 좀 잡아 줄래."
"응 엄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모시옷을 손질하기 위해 숯 다리미질을 하는 엄마를 도웁니다.
"그래 힘이 없나? 잘 잡아 봐!"
엄마가 당기는 쪽으로 자꾸 내 몸이 쏟아집니다.
다리미판이 없었기에 양쪽에서 잡아줘야 다리미질을 할 수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엄마의 일손을 도와주고 나면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합니다. 똑똑 부러지는 연필 깎아 가면서 또박또박 글을 써 내려갑니다. 잘 나오지 않아 침까지 무쳐가면서 말입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엄마의 다리에 베개 삼아 누워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며 꿈을 키워 갑니다.
"우리 딸 오늘도 잘 보냈지?"
조잘조잘 막내 특유의 어린양을 부리며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때 엄마의 손에는 항상 커다란 부채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의 손이 왔다갔다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편안함이 찾아옵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다섯째, 차가운 물이 철철 넘칠 것만 같은 빨간 대야
(사진 출처 : 처서의 길목에서 우리아이 막바지 여름나기 바른생활님)
(사진 출처 : 처서의 길목에서 우리아이 막바지 여름나기 바른생활님)
더운 여름날, 시냇가에 나가 친구들과 목욕을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빨간 대야는 우리 엄마가 직접 해주시던 한여름날의 더위처방전이었습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너무 차가우면 여자한텐 안 좋아."
엄마는 점심 먹으러 와서 우물가에 빨간 대야 하나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하나 가득 받아놓고 또 일하러 나가셨습니다.
저녁때 딸아이라고 밖에 나가서 목욕하지 말고 집에서 하라고 하시며 빨간 대야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낮에 뜨거운 햇살을 먹은 물은 미지근한 느낌이 들어 바로 앉아도 싫지 않은 정도의 온도가 되어있었습니다. 엄마는 손으로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몸을 씻겨 주고는 마지막에 시원한 물을 살짝 섞어 헹구어 주십니다. 엄마는 벌써 차가운 물보다 미지근한 물에 목욕을 해야 잠이 잘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나 역시 쉰의 나이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습니다.
엄마처럼 따뜻한 사랑 내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지만 당신을 닮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내게는 당신이 최고의 피서지였던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여름이 떠나려고 하니 문득문득 더 그리운 게 엄마인 것 같습니다.
엄마! 보고 싶습니다.
*공감가는 이야기였다면 아래 추천을 살짝 눌러주세요
로그인 하지 않아도 가능하답니다.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들면 구독+해 주세요
728x90
반응형
'노을이의 작은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마디 말에 한 뼘의 행복이 자란다. (51) | 2010.08.31 |
---|---|
느릿느릿 멈춰버린 시간속으로 도심속 테마길 (22) | 2010.08.30 |
딸아이 울린 평생 잊지 못할 친구들의 생일선물 (76) | 2010.08.26 |
길거리에서 파는 해산물 주의보! (29) | 2010.08.24 |
버릴 뻔한 욕실 신발의 깔끔한 부활 (24) | 2010.08.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