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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 엄마와 봉숭아
얼마 전, 남편을 따라 지리산 계곡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여보! 오늘 뭐 할 거야?"
"그냥 집이나 치우고 아이들 점심 챙겨줘야지."
"점심은 알아서 해결하라 그러고 내 따라가자."
"어디 가는데?"
"오늘 중학교 동창회 하잖아. 계곡에서."
"그길 내가 왜 가?"
"당신 우리 친구들 다 알잖아."
"그래도."
"가서 친구들 얼굴 보고 산행이나 하자."
산행하자는 말에 혹하여 따라나섰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들과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혼자 카메라를 들고 자연 속을 거닐었습니다. 한창 물놀이하는 모습과 아름다운 계곡을 가슴으로 느낀 후 혼자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펜션 화단 가장자리에 활짝 핀 봉숭아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할 일도 없는데 봉숭아 물이나 들일까?'
사실, 집안일을 하는 주부로서 몇 시간을 꼼짝도 않고 있어야 하거나 밤을 지새야 하기에 봉숭아 물을 들인다는 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밖에 나왔으니 해 주는 밥 먹고 간식까지 챙겨주니 가능할 것 같아 얼른 일을 벌였습니다.
▶ 오후 내내 부치고 있었더니 제법 곱게 물들었습니다.
꽃과 잎을 적당히 따서 바위에 얹어놓고 납작한 돌을 주워와 콩콩 찧어 손톱 위에 올렸습니다. 두 손 모두 다 올리고 계곡으로 가 발 담그고 앉아 있으니 솔솔 불어오는 바람 따라 기억은 뒷걸음질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친정엄마는 그렇게 잔정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엄마로서 존재하는 커다란 거목 같았습니다. 하지만, 손재주는 있어 아버지가 부숴놓으면 고치는 건 늘 엄마였습니다.
"손에 막대기 달았소?" 하면서 후다닥 고쳐놓곤 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앞마당엔 늘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봄에는 개나리, 여름엔 봉숭아, 채송화, 가을은 국화를 키우며 관리를 하곤 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모깃불을 지펴놓고 평상에는 옥수수를 쪄서 간식으로 내놓았습니다. 하모니카를 불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며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럴 때면
"막내야, 손 한 번 내 봐"
"왜?"
"응. 엄마가 손톱에 봉숭아 물 들여줄게."
"와! 신 난다."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면 엄마는 봉숭아꽃 잎을 찧어 손톱위에 올려놓고는 비닐을 가위로 잘라 꽁꽁 묶어주었습니다.
"조심해서 자. 빠지지 않게."
"응. 엄마."
그날은 신경 쓰고 잠자리에 들어도 몸부림을 얼마나 쳤는지 몇 개는 빠져나가 이불을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요 녀석. 엄마가 조심하고 자랬지?"
"그게 내 맘대로 되나!"
"그래도 우리 딸 예쁘게 물들었네."
첫눈 오는 날까지 봉숭아 물들인 게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곤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습니다. 요즘처럼 네일아트는 커넝 알록달록 매니큐어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시절이라 봉숭아꽃으로 물들이거나 아카시아 줄기로 파마하는 게 유일한 멋 내기의 수단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손톱을 바라보니 왜 그렇게 엄마가 보고싶던지....
엄마! 하늘을 보고 외치고픈 마음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딸아이가 밤 12시를 넘겨 집으로 들어섭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와."
"어? 엄마 봉숭아 물들였네."
"너도 해 줄까? 엄마가 우리 딸 해 주려고 따 왔는데."
"싫어 그럴 시간 없어."
"그냥 붙이고 자면 돼."
"그래도 안 할래."
"칫, 뭐가 그래?"
친정엄마에게 느꼈던 그 행복함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마저 싫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들지 않으려는 딸아이를 보니 측은해집니다.
'너희에게 무슨 추억을 만들어 줄까?'
그저 공부만 하라고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아름다운 낭만도 모르고 자라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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