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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물앵두’

by 홈쿡쌤 200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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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물앵두’


오늘은 스승의 날이지만, 우리 아이도 나도 등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몰지식한 선생님의 요구와 학부모들이 건네주는 촌지로 인해 휴교까지 해가며 억지로 쉬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내 어릴 때에는 집에서 낳은 달걀 꾸러미가 특별한 선물이었고, 방과 후 옥수수 빵 나눠주는 담당이 되면 남는 빵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게 해 주는 선생님의 사랑이 너무 좋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가의 물건들이 택배로 날아가고 상품권이 난무하고 서로에게 부담만 주는 학교 분위기, 그 탓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세상이 바뀌고 성적위주의 교육이 되다보니 내 아이 잘 봐 달라는 부모의 욕심까지 보태어지니 그럴 수밖에......

  1985년 우리 집 보다 더 산골짜기인 학생 120명 되는 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때 나이 23살,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일들이 학교현장에서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교감선생님이 큰오빠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한 탓에 많은 조언을 받아가며 지냈습니다. 집에서 다니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기에 사택에서 일주일을 보내다 토요일이면 그리운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오곤 했었습니다. 새내기로 발령받아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 채 하나 하나 배워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소중한 나의 벗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도 함께 쑥이 나는 철이면 같이 쑥 캐러 가기도 하고, 산나물 고사리를 뜯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구슬치기도 같이 하고, 공기받기도 함께 하고, 고무줄놀이. 패차기 놀이, 별스러운 장난감이 없었던 시절이라 아이들이랑 내 어릴 때 놀았던 그 모습처럼 보내는 시간이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서로 믿고 따르고 의지하며 내 작은 가슴 열어 사랑으로 품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도 깨어 영악하기까지 하지만 그때는 우리 학교 다니던 시절처럼 얼마나 순수한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이름 한번 불러 줘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어도 어쩔 줄 몰라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잘못을 했을 때 매를 들어 때려도 사랑의 매를 들었기에 학부모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거나 찾아오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긴 그때에는 검은 전화통에 교환 아가씨와 먼저 통화했던 시절이었고, 그만큼 학교와 학부모들과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발령을 받은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스승의 날 아침,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내 발밑에 놓인 빨간 물앵두가 가지 채 겪어 문 밖에 놓여 있었습니다.‘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쪽지와 함께....그것을 방안으로 들고 들어와 씻지도 않고 한 개 따 먹으니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더 고마운 마음으로 출근을 해 아무리 아이들의 눈치를 살펴도 나오지 않고 이리저리 꼬드겨 물어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에도 아직 누가 갖다 놓고 갔을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몇 안 되는 학생이라 글씨를 보면 대충 짐작은 가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학생들도 50명 정도 밖에 되지 않고 복식수업을 해야 하는 3년째 되는 해, 아가씨 선생님이 첫 발령을 받아왔습니다. 멋지게 차려입고 온 초임선생님을 보고는 모두 반가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학교를 한번 둘러보고 난 뒤, 그만 훌쩍 훌쩍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 입니다.

“왜요 선생님?”
“저~ 여기서 근무 못하겠어요.”
“..............”

시골에서 태어 나 적응을 잘 해 가고 있는 나와는 달리 아스팔트길인 면내에서 꼬불꼬불 비포장 길을 첩첩산중 십리 길을 더 와야 했으니, 시내에서 자라나 그런 환경을 보고는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상하신 교감 교장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달래셨습니다.

그래도 출근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차가 있기에 아침 일찍 출발 해 출퇴근이 가능하다고 하니 그때서야 얼굴엔 빙그레 미소가 번져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허긴 나 또한 엄마가 보고 싶어 집에 가고 싶은 마음 가득하였으니까요. 하지만, 학교 안 사택에 살면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보고 나만의 시간 잘 활용하며 견뎌내었습니다.  제가 4년을 근무하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학교는 폐교되어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자꾸만 줄어드는 농촌 인구 때문에 나의 소중한 처녀 시절을 잃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지금은 23년이란 세월이 흘렸으니 그 녀석들이 36살 정도가 되었겠지요? 며칠 전, 동료가 시골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주는 빨갛게 익은 물앵두를 보며 난 추억을 먹었습니다. 유난히 눈동자가 해 맑았던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지금은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그 순진했던 녀석들이 자라서 이 나라의 일꾼들이 되어 있을 거라 믿어 봅니다. 스승의 날만 돌아오면 코 흘리게 녀석들이 더욱 보고 싶어집니다. 순수하기만 했던 그 시절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물은 꼭 값이 많이 나가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버렸음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써 봅니다. 하루를 선물 받은 것 같아 기분은 좋지만, 그래도 가슴한 곳에는 씁쓸할 뿐입니다.

선물 중에 가장 소중한 선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마음의 선물’이라는 사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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