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은 남편과 함께 혼자 지내고 계시는 시골로 향한다. 83세의 작지 않은 연세로 어려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6남매에게 다 받쳤기에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혼자 지내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시며 우리 집 보다는 친구가 있는 시골이 좋다고 하시는 시어머님. 이제 자식들이 차려주는 밥 받아 드시며 사셔야 할 연세이지만, 모두가 멀리 떨어져 객지생활을 하고 있어 혼자 차려 드시고 계신다. 할 수 없이 가까이 지내고 있는 셋째 아들인 남편이 40~50분이면 달려가는 곳에 주중에도 가끔 들리곤 한다. 주말, 과일과 몇가지 반찬거리를 사서 시골 집으로 들어서니 사돈 할머니가 함께 계셨다.
“안녕하세요?”
“응. 며느리인가 보네.”
“네.”
인사를 나누고 몇 번 뵙지 않아 누구신지 잘 몰라 하고 있으니 시어머님이
“작은 어머니 동생아니가.”
“아! 그러고 보니 작은 어머님과 닮았어요.”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아닙니다.”
시장을 봐 간 것으로 이것저것 반찬 몇 가지를 장만 해 두고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적적하실 것 같아 어머님께 낮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옆에서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
“어머님! 곁에 누가 계세요?”
“응. 사돈이지.”
“아직 안 가셨어요?”
“혼자 있으니 적적한데 할망구가 있으니 좋네.”
“네. 다행이네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 뒤, 매일 어머님과 통화 하시는 인천에 살고 있는 시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수님! 사돈어르신이 함께 계시니 엄마가 좋아하시네요.”
“네. 적적하시지 않은가 봐요.”
“형수님의 구세주이지요?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늘 고생많으십니다.”
“아니....”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죄스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기에.
그렇게 통화를 하고 난 뒤, 시동생은 막내 동생에게 전화를 해 사돈어른을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용돈까지 챙겨드리며 어머님 집에서 지내줄 것을 당부하셨나 보다. 사돈은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시어머님에게 와 계시면서 함께 밥도 차려먹고 노인정도 함께 다니시는 것 같았다. 어머님이 이제 활동하시는 시간보다 누워계시는 시간이 더 많다. ‘알츠하이머’초기 증상이 있다는 의사진단서를 끊어 보험공단에 ‘요양보호사’를 신청해 둔 상태다. 우리 집으로 모신다고 해도, 요양병원으로 모신다고 해도 당신이 싫다고 하시고, 자식들이 해야 할 일을 사돈어르신께 맡겨놓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토요일에 시골을 다녀오고 휴일은 남편과 가까운 곳에 산행을 했다. 늦은 저녁시간에 들려오는 시동생의 목소리.
“형수님! 저 집 앞입니다.”
“네? 15일 어머님 생신날 오신다고 했잖아요.”
“휴가입니다.”
“휴가 바뀌었어요? 가족들은?”
“아니, 저 혼자 왔어요.”
가족들은 시어머님 생신 때 내려오기로 하고 혼자 왔다고 한다.
수박을 썰어 함께 먹으며 형님과 또 엄마 걱정을 앞세웁니다.
“사돈어른 말이야. 아들이 알면 싫어하겠지?”
“큰 아들과 함께 사시는 것 같던데 형편이 좋지는 않나 봐.”
“집에 갔다 오셨으니 아들도 허락하신 거겠지?”
“글쎄.”
어머님 보다 한 살 더한 84살이라고 하는데 우리 어머님에 비하면 건강하시다. 허리 하나 굽지 않으셨고, 아픈 곳 하나 없으신 것을 보니 너무 부럽기까지 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동생은 벌써 시골에 가서 어머님을 찾아뵙고, 피순대로 유명한 완사에서 육회까지 사 노인정에 갖다드리고, 3일간의 휴가를 바다나 산으로 떠나지 않고 엄마 곁에서 보내고 싶어 내려온 모양이었다. 며칠 후면 어머님 생신 때 또 그 먼 길을 내려와야 하는데 말이다. 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온 이유는 친구들과의 모임 때문이었던 것. 남편의 바로 밑에 동생인데도 엄마를 생각하는 그 마음은 어느 아들도 따라갈 수가 없다. 집안 대소사에 들어가는 돈은 모두 형제간의 계금으로 처리를 하는 대도 시어머님의 통장에는 월 10만원이 꼬박꼬박 찍혀있다. 그저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나누려는 시동생의 마음이 너무 곱기만 하다.
시동생은 나에게도 많은걸 주고 있다. 시어머님 한약 지어 보내면서 내 것까지 챙기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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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의 우애를 담았던 글이 월간 좋은 생각에 실렸었고,
"형수님! 비 많이 왔죠? 별일 없으시지요?"
"네, 도련님, 비는 많이 왔지만 우리는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네요. 다들 건강하지요?"
폭우와 장마로 인해 남부지방의 홍수와 산사태 등 인명피해가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자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
막내로 자라난 탓일까? 형수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동생을 둔
기분처럼 남모르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33세의 늦은 결혼으로, 앞서 못한 따뜻한 사랑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나누며 살아가지만,
아이들의 육아문제가 여느 맞벌이 부부처럼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형님! 제가 일주일만 봐 드릴게요."
"동서야!~ 도련님은 어떻게 하고?"
"대충 밑반찬 해 두고 가면 돼요."
9년 전 첫딸을 낳고, 두 달의 특별휴가를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이를 돌보기로 한 시어머니는
가을걷이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눈치챈 인천에 사는 손아래 동서가,
자신도 6개월된 조카를 둔 처지이면서도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일주일간 도련님을 혼자 둔 채 두 아이를 돌보는
힘겨움을 마다 않는 천사다.
또, 어느 해였던가? 시골에서 명절을 보내고 시어머님의 정이
가득 담긴 보따리를 하나씩 챙기고 있는데,
인천 도련님께서 "형수님. 저 좀 잠깐만 보세요."
"이거 형수님 쓰세요."
"뭘 이런 걸, 어떻게 이걸 받아요..."
무심코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글쎄 100만원
수표가 아니겠습니까? 놀란 토끼 눈으로
"아림이 아빠, 도련님이 주신 수표가 십 만원이 아닌 100만원 인데요?"
"전화나 한번 해 봐라."
"형수님, 집에 쇼파가 없던데 하나 사세요."
"삼촌, 우린 돈 없어서 안 사는 것이 아니고..."
"그러시지 말고 그냥 하나 갖다 놓으세요. 아셨죠?"
"네, 고맙습니다. 형님한테 그렇게 말씀 드릴께요."
그러나, 우리 남편의 반대로 통장에 그냥 넣어 두었지요.
몇 달 후, 어머님 생신 날 우리집에 들른 도련님은 여전히
쇼파가 없는 것을 알고는 택배로 쇼파를 직접 사서 보내와,
우리는 쇼파를 두 번 받은 셈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쇼파는 도련님의 사랑과 함께 우리 가족의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각각 차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의 차가 낡아 폐차를
해 버리자 기동력이 필요한 시기라서,
임시로 거제 막내삼촌의 새차를 빌려와 한 달을 잘 타고 다녔다.
그런데, 남편이 늦은 밤 도로 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실수로 차가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져 아직 할부금도 끝나지 않은 차를
폐차시켜야 했다.
다행히, 남편은 표나지 않게 수십 바늘을 꿰매야 하는 사고였지만,
막내 도련님은 "형님만 무사하다니 괜찮습니다. 차야 돈 벌어서
다시 사면되지요." 얼마나 미안하던지...
사고가 나고 얼마 후, 사려 깊은 인천 도련님은
"차도 잃고, 할부금 내려면 속상할 건데." 하시면서
"막내야, 이백만원이다. 가져가서 할부금 갚아라."
"형님, 두세요. 제가 천천히 갚으면 됩니다."
아무리 있어도 선뜻 현금 내어 놓기가 쉬운 일인가.
어찌 보면, 우리 살림보다 낫지 않은데도 따뜻한 형제애가
몸에 배인 도련님들, 만감이 교차하는 죄스러움과 고마움과
기쁨이 내 마음을 휘감는다.
명절이나 시골집을 다니러 올 땐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꼭 묵고
가는 동서네의 따뜻하고 고운 마음,
무심히 본 시어머님 통장에는 어김없이 찍혀 있는 도련님, 성00.
그저 나누고, 배려하고, 효도하는 그 마음 앞에 나의 존재는
작게만 느껴지고, 땅 속으로 꺼져 드는 무안함은 형님된 탓 만일까?
언제나 따뜻한 마음 가지고 살아가는 시동생들을 보면서
난 오늘도 느껴 봅니다.
받는 사랑보다는 주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긴 장마로 휴가도 무색하게 지나가는데,
시동생의 따뜻한 전화가 시어머님 가까이 사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모셔야겠다고 다짐하게 하였고,
바쁜 일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 깔끔히 변한 지붕으로 인해 새집처럼 보입니다. 기와처럼 보이긴 해도 재질이 특이 해 보였습니다.
형수님, 제가 더 고맙습니다!
33살 늦은 결혼을 했었지만, 남편과 결혼생활을 한 지 벌써 16년째 들어서게 됩니다. 어제는 시골 어머님댁을 다녀왔습니다. 신혼 때에는 주말만 되면 달려가 청소도 해 드리고 함께 지내다오곤 했던 시댁입니다. 지금은 아이 둘 학교, 학원, 친구들이 더 좋다보니 한 주, 두 주, 빠질 때가 더 많아지고 소홀해 지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은 혼자서 생활하시는 우리 시어머님.
"야야~ 지붕이 다 되었는가 물이 새고 그러네."
"네, 아범한테 이야기 해 볼게요."
셋째 아들이지만,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늘 우리에게 전화를 하시는 어머님이십니다.
며칠 후, 이리저리 전화를 해 알아보는 남편,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지붕하나에도 260만원이나 들었고, 한나절 만에 인부들이 와서 뚝딱 갈아치운 모양이었습니다.
"여보! 돈 260만원 지붕 값 송금해야 하는데"
"어? 그 만큼은 다 채워 줄 수 없는데……."
"좀 만들어 송금 해 줘라. 급한가 보더라."
"..............."
"큰아들 명의로 되어있어 우리 집도 아닌데 왜 우리가 해야 하는데? "
너무 속보이는 소리를 했나 싶어, 남편 눈치만 보았습니다.
"큰형님한테 전화하니 어머님 돈으로 하라고 하시더라."
"어머님 돈이 어딨냐고 물어보지"
"그냥 가슴이 갑갑해서 끊어 버렸어"
큰형님께서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계시기에 돈이 없는 줄은 알지만, 말을 그렇게 하니 조금 서운했다는 남편의 말이었습니다. 사정이 그러니 알아서 좀 해 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얼마 있어야 적금을 타기에 당장 돈이 안 된다고 하자 남편은 바로 밑에 동생에게 전화를 합니다.
"00아? 촌에 지붕 갈았는데 100만원만 송금해라. 형수가 돈이 다 안 되나 보다"
"네 형님 알았어요." 두 말도 없이, 대꾸하나 하지 않고 알았다고 하시는 시동생입니다.
우리 시동생은 인천에서 운수회사를 다니고 있고, 동서는 치과 간호사입니다. 언제쯤이었을까? 막 아기를 낳아 한참 기르고 있을 때, 아마 명절날이었을 것입니다. 시골에서 명절을 보내고 각자 집으로 떠나는 길에
"형수님! 이거" 하시며 수표 한 장을 건넸습니다.
"왜요? 이런 걸 나에게?"
"그냥 형수님 사용하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마지못해 받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10만원인 줄 알았던 수표가 동그라미 하나가 더 붙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삼촌! 수표가 바뀐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형수님! 거실에 소파나 하나 사 놓으세요"
"아니……."
"알았죠? 끊습니다." 남편은 아이들 어리니 뛰놀기 좋다며 거실에 소파는 사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우리 집을 찾은 삼촌이 "형수님 소파 안 사셨어요?"
"형님이 ……."
그렇게 보고 가시더니 바로 택배로 소파가 날아왔습니다. 두 번에 걸쳐 소파 값을 받은 것이었지요.
또, 시어머님의 한약을 지으면서도 '형수님, 한의사와 통화하세요. 친구입니다'하시며 제 보약까지 지어 보내시는 고마운 삼촌이십니다.
며칠 전, 지붕 값을 보냈나 싶어 통장을 찍어보니 삼촌이름으로 150만원이 적혀있어
"삼촌! 100만원만 송금하라고 그러는 것 같던데 150만원을 보내셨어요?"
"엄니 모시고 병원 갔다 오셨잖아요. 병원비 보태세요."
어머님이 머리가 너무 아프시다며 MRI를 찍어 보니, 신경성이라며 병원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고마워요. 삼촌...."
"아니, 형수님, 제가 더 고맙습니다. 맨날 가까이 있으니 형수님 고생이 더 많습니다."
"별 말씀을요. 아무나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가까이 있으니 하는 일이구요."
"그래도 우리엄마한테 잘 해 줘서 고마워요"
"............."
너무 고운 마음을 가진 천사표 삼촌과 동서입니다. 시어머님의 인공치아도 동서와 내가 함께 해 드렸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으면서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예쁜지요.
많이 가졌어도 나누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늘 마음으로나마 나누는 형제애를 보면서 행복함에 젖어 봅니다. 다 넘어가는 시골집이었지만, 그래도 형제간에 힘을 모아 지붕개량을 해 놓은 것을 보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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