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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외갓집의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행복

by *저녁노을* 2009.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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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의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행복

 

국민학교를 다니던 나의 어린 시절, 해마다 방학이 되면 외갓집을 찾았습니다. 외갓집에 갈 때는 엄마 손을 잡고 새 운동화 신고 깡쭝깡쭝 뛰며 신이 났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외할머니는 인자하신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 강아지 왔구나.‘하시며 내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 얼굴도 모릅니다. 외할머니를 따라 새 쫓으러 논에도 갔고, 밤에는 마당에 큰 멍석을 피어놓고 쑥을 베어 모깃불을 피우고 수박, 참외, 감자 등을 먹으며 할머니의 귀신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워 혼자서는 화장실에 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반딧불이를 잡아 눈에 붙이고 장난치며 깔깔대던 기억이 새롭기만 합니다. 할머니는 옆에 누워 있는 나에게 재미있는 듯 부채질을 해주셨고 나는 부채바람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보리밥을 샘물에 말아서 텃밭 고추를 따다가 된장을 찍어 먹으면 얼마나 달콤했던가. 어느 날에는 외숙모가 닭장에서 닭 똥 묻은 달걀을 꺼내어 냄비에 삶아서 나 혼자 먹으라고 주셨을 때 감격은 지금도 가슴이 흐뭇하게 전해옵니다. 이미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져가는 외갓집을 생각하면 그래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 외할머니가 그리워 살포시 미소를 지어봅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기에 내게 더욱 소중한 것 같습니다.



우리 6남매가 자라고 난 친정집은 다 쓰려져가는 모양을 하고 텅 비어 있습니다. 추석이 가까워지자 조카들과 함께 형제들이 모여 성묘를 합니다. 오랜만에 떠들썩하게 만나 담장 너머로 웃음을 흘려보냅니다. 이웃에 사시는 사촌들도 찾아와 우리의 즐거움에 동석합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기분은 왜일까요? 환갑도 넘기지 못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버린 큰오빠 때문입니다. 동생들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까지 시켰는데 당신의 건강 지키지 못하고 병을 알고 6개월 만에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명절이면 고향이라고 동생들이 찾아 와야 한다며 맏아들로서 책임을 다하시며 시골집을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청소도 하고 텃밭도 볼보곤 했고, 추석 당일 날 이북이 고향인 올케언니와 마지막까지 남아 친정을 찾아오는 막내인 저를 기다려주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더 그립고 보고 싶은가 봅니다. 항상 부모 대신이었으니까요.

“우리 막내 어서 와!”

“고모! 이것 좀 가져가.”

엄마가 살아계실 때보다 더 많이 차에 실어주곤 하셨습니다.


그러다 큰오빠가 안 계시니 쓸쓸해서 싫다고 하며 올케는 제사를 가져가 지냅니다. 교회에 나가다 보니 제사가 아닌 추도식을 하고 자식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오빠의 유언으로 평장을 한 산소를 찾아 시골로 옵니다. 시집 장가간 며느리와 사위를 앞세우고 말입니다.


명절이면 사라진 친정으로 몹시 아쉬워했는데 작년부터 나와 가까이 사는 언니 집으로 모입니다.

“처제! 어디야? 시골이야?”
“네. 형부. 산소 갔다가 막 출발 하려구요.”

“그럼 우리 집으로 와 올케 왔어.”

“네.”

곁에서 듣고 있던 우리 아이들 마냥 신이 납니다. 어릴 때 내 기분처럼 말입니다.

“엄마! 외숙모 이모 집에 온 거야?”
“응.”
“와우! 나도 외갓집 간다!”

챙겨 입고 친정으로 나서는 숙모와 사촌들을 보고 나처럼 녀석도 많이 부러웠나 봅니다.


어머님이 걱정되어

“어머님 혼자 두고 어떻게 가지?”
“형님! 제가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그럴래?”

나도 따라 딸아이 마음처럼 마음은 붕 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언니 집을 들어서니 얼마 전 결혼을 한 조카들과 조카사위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비록 엄마가 없는 친정이지만 그저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일어서려는데 큰 올케가 아이들한테 용돈을 주었습니다. 얼핏 보니 오천 원이었습니다.

‘어? 만원도 아닌 오천 원을 왜 주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어머! 어머! 어떡하니!”

“왜 그래 언니”
“참나, 내가 정신이 이렇게 좋다. 00아, 외숙모가 오천 원을 줬지?”
“네.”

“잠시 헷갈렸다! 미안해!”
“아닙니다.”

그렇게 또 오만 원 신권으로 한바탕 웃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쉬운 이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에게

“넌 오천 원짜리 받고 서운했겠다. 평소 외숙모 만 원짜리로 줬잖아.”

“좀 이상하다 했지.”

“말을 하지.”
“엄마는! 그걸 어떻게 말을 해. 주시는 대로 받아야지.”

“그런가?”
오만 원짜리 신권을 받아 든 딸아이

“엄마! 처음 만져 본다. 역시 외숙모가 최고야.”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기에 우리 아이들은 외할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외할머니의 사랑도 오래 받지 못했지만, 외가에서 외숙모 외사촌 이모가 주는 따뜻한 사랑을 아직 느낄 수 있고 전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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