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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아버님이 주신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by 홈쿡쌤 2009.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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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주신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노총각 서른 넷, 노처녀 서른 셋의 나이에  무엇이 그렇게 끌렸는지 모르지만, 맞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남편은 바로 밑에 동생이 애인이 있어 빨리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급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리가 2월에, 시동생은 4월에 한 해 두 번의 결혼식을 시켜야 했었습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던가요? 직장생활을 하는 나에게 아버님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를 가졌고 첫딸을 얻었습니다. 직장여성에게 가장 큰 고민은 육아문제입니다. 할 수 없이 딸아이를 시골 어르신들에게 보냈습니다. 주말마다 시골로 가서 지내다가 아이가 엄마를 알아보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엉엉 우는 바람에 할머니가 업고 이웃집으로 데리고 가고 나면 차를 타고 나오면서 나 역시 훌쩍훌쩍 아프게 이별하는 장면을 보시고는

“야야! 그냥 네 엄니 데리고 가거라.”
“네?”
“데리고 가서 아이 훌륭히 잘 키워.”
“그럼 아버님은요?”
“나야. 어른이니 걱정 마. 혼자 지내도 돼.”

“.........”

그렇게 우리 집으로 시어머님을 모시고 와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반찬을 해서 아버님이 드실 수 있도록 해 두고 왔습니다.


제법 아이들이 자라 3살이 되었습니다.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하자

“안 돼! 아직 어려서. 아이들한테 맞고 오면 우짜노.”

아버님이 손녀딸 생각하는 마음에 못 이겨 1년을 더 어머님 손에 자라고 4살이 되어 어린이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삼촌의 권유로 가까운 병원에 종합검진을 받게 되었으나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했습니다.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나온 결과는 흉선암 이었습니다. 평소 건강만은 자신 있어 하시던 아버님은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기에 병원복이 어색한 모양이었습니다. 말기라 더 이상 치료도 없다는 말씀에 우리 집을 모시고 왔습니다. 몇 개월을 그렇게 지내다 어머님이 집으로 모시고 싶다고 해 시골로 옮겼습니다.


아버님의 몸은 점점 심해져서 산소 호흡기를 꼽고 누워 주무시지도 못하고 앉아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주말에 어린 녀석들을 데리고 시골을 찾아가니 손자들의 재롱에 그 아픔 조금이나마 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뒷날부터는 퇴근을 하고 어린 녀석을 앞에 안고 딸아이는 옆에 앉혀 매일매일 아버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님이

“뭐 하러 매일 와!”

“아버님이 좋아하시잖아요. 저것 보세요.”

이상하게 엉덩이부터 밀어 넣으며 할아버지 앞에 앉히는 딸아이를 보고는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니 피곤함 잊고 마음은 저절로 아버님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깊은 사랑 받으며 살아왔기에 조금이나마 되돌려 드리고 싶었었는데 그 세월 그렇게 길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6개월을 넘기시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추석을 며칠 앞둔 날, 시어머님의 실수로 집을 홀랑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차례를 지내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교회에 다니시는 큰 아주버님은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전해왔습니다. 형님이 몸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긴 하지만

“요즘, 제사 안 지내는 사람들 많아.”라고 하시면서.

“아니, 제사는 안 지내도 추도식은 하잖아요.”


친정에도 부모님 추도식 날은 멀리 떨어져 살던 형제들이 모여 찬송가도 부르며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오곤 합니다. 그런데 아예 제사를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하고 쓰려진 집도 지을 생각이 없다고 하니 아버님이 가졌던 많지 않은 재산 큰아들 앞으로 다 주었는데 그 임무는 포기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유교사상에 젖어 살아온 83세인 우리 어머님 세대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동생들과 함께 내린 결론은 어머님이 살아계실 동안만이라도 걱정 없으시게 지내자는 생각이 모여 차례상을 준비해 추석날 아침 일찍 시골로 향했습니다. 다 쓰려지고 쓰레기만 남은 안채를 보니 망연자실했지만, 묵혀두었던 사랑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준비해 간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아버지. 올해는 사랑채에서 차례를 지냅니더!”

먼저 고하고 나서 큰집 작은집 아주버님과 사촌 조카들이 우르르 몰려와 함께 절을 올렸습니다.


종교의 차이로 오는 제사문제는 어느 집이나 커다란 골칫거리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습니다.

 

동생들과 의견모아 아버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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