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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의 작은일상

아빠 없는 하늘 아래 당당히 홀로 선 조카

by 홈쿡쌤 2009.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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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돌아가시고 안 계신 셋째 오빠의 아들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녀석이 4~5살쯤 되었을까? 연년생이었던 형과 장난을 치며 아빠의 장례식에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녔었는데 이렇게 자라 결혼까지 하게 되었던 것. 여고를 다닐 때 오빠는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꼭 막내인 제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 용돈으로 친구들과 분식집으로 영화관으로 어울려 다니곤 했는데...





친정에는 4남 2녀 6남매입니다. 연예인처럼 잘 생긴 셋째 오빠는 성격이 좋아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처음 간염이 유행할 때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이런 덩치로 이렇게 작은 간을 가지신 분은 처음입니다.' 선천적으로 작은 간을 가지고 태어났던 것입니다.
엄마는

“이놈아! 가려거든 어릴 때 가지.”

시골에서 7살 때 다 죽어가는 오빠를 등에 업고 읍내까지 십리길을 달려 살려 놓았더니 이런 험한 꼴 보게 한다며 원망 어린 목소리로 통곡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엄마의 마음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맞선을 보고 그렇게 하기 싫다던 결혼도 아버지가 원하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버린 어리석고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열심히 회사 다니면서 13평 집 한 칸 남기고 우리와 영원한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 뒤 올케는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병원에 근무하며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큰오빠는 아이가 셋이면서도 셋째 오빠의 아들 둘을 데려다 키울 생각을 했습니다.

“제수씨! 좋은 사람 있으면 시집가세요. 아이들 걱정 마시구요.”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올케였습니다. 결혼한 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과부가 된 올케의 친정엄마는 고명딸에게

“어디 물으니 혼자 살아야 할 팔자라더라.” 하면서 결혼을 권하지 않았고

“아들 둘 보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두 녀석의 학비는 다른 오빠 셋의 몫이었습니다. 큰조카는 삼촌을 찾아가서 용돈도 원룸을 얻을 돈도 받아가곤 했지만 작은 조카는 대학 등록금도 제 손으로 벌어서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다부진 녀석입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큰아버지한테 먼저 소식을 알리는 착한 녀석이기도 하고요.

“삼촌들한테 언제까지 손 벌릴 거야?” 하면서 등록금이 작게 든다는 순천대학 국립을 선택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조리학과를 나와 호텔에 취직도 했습니다. 마지막 학기에 교육학을 들으면 교원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말을 했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엄마가 머뭇거리고 있자, 우연히 알게 된 큰 올케는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잖아. 내가 줄게.’ 하면서 학비를 기꺼이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건 남에게 손 벌리지 않는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앞일을 생각해 내린 큰 올케의 용단이었습니다.


작년에 큰 조카 결혼식 때 작은 녀석 애인이라고 우리에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때 형부가 질부 될 처녀를 보고는 첫 마디가

“아가씨가 옷을 왜 저렇게 입고 와! 그래도 시댁 어른들이 다 모이는데.”

“왜? 수더분하니 좋던데 뭘.”

“아니, 청바지에 티를 입고 오니까 그렇지.”

“그냥 편안하게 입고 온 거겠지. 멀리 몇 시간을 차를 타고 와야 하잖아.”

우리에게 남긴 아가씨의 평은 거기서부터 점수를 깎아 먹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기본예의를 모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인다는 ‘결혼식’ 이어서 그럴까요? 그때 보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와! 신부 참하네.” 형부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습니다.

한 번 봐서 이런 사람이라는 걸 단정 짓기는 어렵겠지만, 신부 부모님의 후덕하신 모습에서 우리가 잘못된 평가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뚜벅뚜벅 걸어서 들어가는 녀석을 보니 너무 흐뭇하였습니다. 주례선생님은 잘 키워주신 부모님께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씩씩하게 잘 키워 장가보내는 엄마에게 효도하라고 하시며 절을 올리게 했습니다. 그 말에 그만 올케가 눈물을 보이자 신부도 따라 줄줄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모습을 보고 있던 우리 가족 또한 연방 저도 모르게 타고 내리는 눈물 훔치기에 바빴습니다. 그렇게 식을 마치고 폐백 실로 향할 때 둘째 올케가 절 값 봉투를 준비하려고 가방을 들여다보고는

“어머! 이를 어째!”
“왜 언니?”
“축의금하고 절 값 봉투가 바뀌었어.”

“조금 있으면 신랑 올 겁니다. 그때 바꾸면 돼요.”

가만히 보니 축의금 들어온 봉투를 아예 신랑에게 다 챙겨 주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마인 올케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조카 녀석이 혼자 열심히 벌어 놓은 돈으로 혼사를 치렀으니 당연히 축의금도 조카가 가져가야 된다고 말하는 올케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오빠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만큼 알아서 일을 처리하는 당당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던 것입니다.


“고모! 우리 예단 같은 거 서로 안 주고 안 받기로 했어.”

“그래. 잘 했네.”

“서운하지?”
“아니야. 지네들 잘 살면 되지. 그게 뭔 대수야.”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 걱정 마.”

결혼반지 하나씩 나눠 끼고 둘이서 작은 아파트 하나 전세 얻었다고 말을 합니다.


요즘, 취직도 못 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는 컹거루족도 많다고 들었는데 자기 인생 알아서 챙길 줄 아는 조카였으니 얼마나 대견한지 모르겠습니다. 물러 받은 재산 하나 없이 같은 일을 하는 질부와 힘을 합쳐 험난한 이 세상 잘 헤쳐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이제 잘 살아 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너무 훌륭히 자라줘서 고마워.

사랑하는 우리 조카

축하한다.

영원히 행복해^^


오빠! 하늘 나라에서 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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